NOTICE 



예수는 가는 곳마다 힘없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힘있고 권세있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선동가'나 '미친 놈'으로 불리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권세있는 자들이 오히려 그의 이름을 앞세워 힘없는 이들을 박해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주머니를 쥐어 짜내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자들이나 힘없는
이들의 편에 서있는 작은 예수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이들을 보고,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는 빨갱이"라고 표현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고 '사이비 신부' 혹은, '신부의 탈을 쓴 범죄자'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새만금에게 한 신부는 마지막 희망이었고,
여전히 진행형인 평택의 사람들에게 한 신부는 여전히 함께 싸워주는 든든한 버팀목 같은
사람이다.

수단 입은 투사들, 이 두 형제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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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2006. 1
회현동
Canon New F-1 / FD 50mm 1.4 / Fuji NPH 400

허름한 도심 아파트가 재개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말만되면 여기저기 사진찍는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장바구니를
든 동네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였다. 히트 친 어느 영화에 주인공이 지내는 곳으로 그려진
그 곳은 어쩌면 영화가 아니었다면 조용히 사라지는 수 많은 곳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사라짐과 재잘거림과 침묵이 공존하는 곳.
시들어가는 식물들과 어린아이들의 장난감과 굳게 닫힌 빈 집이 공존하는 곳.

늘 생각하지만 사진은 사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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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동네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하던 때,

동네어귀에 붙어있는 후보자들의 포스터를 살펴보다가 낯익은 얼굴들 한 참뒤에 - 기호 8번, 당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란걸 첫 눈에 느낄 정도 - 웬지 뼈있는 글귀를 적어두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아저씨가 보였다.

후보자 연설회때도 그 아저씨는 기호1, 2, 3번처럼 동원된 사람들의 박수 갈채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우루루 빠져나가는 텅빈 공간을 향해 연설을 해야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포스터에 써있던 글귀를 강조했다.

"여러분, 우리가 정치를 멀리하면, 정치도 우리를 멀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선것은 저의 당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정말 될만한 사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뽑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족속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일본처럼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별로 관심 없어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야만 지들 맘대로 '정치'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까지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모습의 정치를 모여주지 못한 것은 정치가들이 원래 나쁜 놈들이거나 머리가 돌이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탓을 할 줄 모르고 남 탓만 하고 있습니다. 제발 귀가 있으시면 듣고 눈이 있으면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이 모양 이 꼴의 나라판은 그들 탓이 아니라 그런 그릇된 자들을 뽑은 우리 탓이란 사실을."

그 해 선거에서 그 아저씨는 8명의 후보중, 6번째의 득표로 낙선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그렇게 하고자 했던 말들을 가슴에 담았고, 한참 뒤의 대통령 탄핵에 이은 국민들의 심판을 목도하면서 그의 말이 거짓이나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었다.

정말 해야할 말이 있을 때, 그 말을 참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방치하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는 것. 박해를 받고, 아픔을 겪더라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않고 살려고 애써보련다.

...교양과정이 끝나고 2학년이 된 후부터 나는 차차 외교학과 학생에서 단순한 문리대생으로 바뀌고 있었다. 교련반대 학생투쟁이 시작되었다. 학원에서 군사훈련을 시행하겠다는 것 역시 '안보논리'의 연장이었고 나에겐 또한 분열의 그리고 증오의 이데올로기였다. 또 나는 학생대중의 일원으로 열심히 뛰었다.

반군사파쇼독재 및 반교련 학생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어, 급기야 본관 강의실이 학생들에게
농성장으로 점령되었을 때 대학측에서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교수학생간담회'
열었다. 각 과별로 진행되었으므로 나는 당연히 외교학과의 '교수학생간담회'에 참석하였다.

간담회는 “어떻게 하면 외무직 시험에 패스할 수 있는가?”와 “외무직 시험과목이 외교학과보다
법대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시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불만과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그 답변으로 끝났다. 교수도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학생투쟁으로 갖게된 '교수학생간담회'였는데 외교학과의 그것은
'외무직 시험 합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된 것이다.

나 역시 외교관이 돼 보겠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기에 그 욕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교수들까지 그 장단에 춤을 추다니.
적어도 당시의 이슈였던 파시즘과 대학 내의 군사훈련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라도 밝혔어야
옳았다.

그리고 나서 “하지만...... 아직은 공부할 때다”했으면 '교수학생간담회'에 임한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나는 아직 2학년인 주제에 그리고 제 깐엔 무슨 학생운동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는 자격지심에 불쑥 뛰어들어 문제 제기도 못하고 3,4학년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학생투쟁의 현안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교수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때문에 간담회장을 박차고 일어나 나오지도 못하고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간담회 내내 나는 '개똥 세 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똥 세 개.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의 할아버지께선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대부분 잊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신께서 중국의 노신을 읽으시고
좀 바꾸어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옛이야기에 실제로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 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 글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개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그 중에는 박정희의 지명을 받아 유정회의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광주항쟁 때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국보위원인가가 된 사람도 있었다.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을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홍세화 - 개똥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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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5. 1
명동
엘리슨 레퍼와 그녀의 아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과학모형반'이라는 동아리에 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도 '프라모델'이라는 것은 '조립식' 혹은 '장난감'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없는 용돈을 외제 키트와 도료, 콤프레서와 피스에 투자하는 우리를 보고 많은 이들이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손가락질 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우린 땀흘려 키트를 조립하고, 도료를 칠하고 디오라마를 꾸미면서 행복해했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으니까.

그 때, 나의 동기들 중에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고 오른손을 전혀 못쓰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프라모델을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 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와 같은 뜻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 누구보다도 그 한 손으로 열심히 키트를 조립했고, 진흙을 주물렀으며, 열심히 색칠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솔직히 상황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나도 이만큼은 만들겠다.'는 혹평을 불러오기 일쑤였고, 행여 그 친구가 그런 얘기를 들을까봐 우리는 늘 공동작업이라는 명목하에 그 친구의 작품을 다시 손보고 고쳐주는 일을 자원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녀석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웠는데...
그걸 우리는 알고 있었는데....그것에 다시 손을 댔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 피땀 흐르는 노력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당시 그 친구가 받을 상처가 아프다는 것만 생각했고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작년, 시내버스에 올랐다가 졸지에 타고 있던 버스가 장애우들에게 '점령'된 적이 있었다.
자신들의 손목을 버스 손잡이에 수갑으로 채우며 '우리에게도 이동권을 달라!'고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약속시간에 쫓기던 내게 짜증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다. 손님 중에 어느 아저씨가 '여러분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잖아요?'라고 던진 이야기에 그 분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다.

'여러분은 이 차가 아니면 다음 차라도 옮겨 타실 수 있지만 저희는 그럴 권리조차 박탈된 사람들입니다.'

버스를 옮겨 타기전에 버스에 들이닥친 건장한 사람들에 의해 그들은 강제로 내려졌고, 그때쯤 나는 약속시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우리는 옮겨 탈 수 있는 사람들이지....
이유없이 속에서 울컥하는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이 땅은 장애인으로 살기도, 비장애인으로 살기도 버거운 곳임을 절감했다.
우습게도 그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글줄이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이었다는.

'우리, 사람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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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많은 이들의 삶을 싣고 인천 송도역과 수원 사이를 달리던
꼬마열차 수인선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5년
12월 31일 폐선되었다.


레밍 딜레마라는 마케팅 서적이 있습니다.
북극권에 서식하는 설치류 레밍이 벌이는 자살소동에 관한 이야기를 마케팅 기법으로 풀어쓴 책이죠. 사실은 레밍은 지의류만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일정수준으로 개체수가 늘어나면 건너 편 땅으로 옮겨가기 위해 물에 뛰어들곤 합니다. 그 와중에 살아남는 녀석들보단 죽는 녀석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은 ‘자살소동’이라 부르는 것이죠.

책에서 레밍이 물에 뛰어드는 것은 ‘그냥’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들 뛰어드니까 거기에 휩쓸려서 물에 뛰어드는 미련한 녀석들로 표현되고 있죠.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석들 중 조금 깨인 집단이 나오게 됩니다. “왜 우리는 물에 뛰어들까?”라는 의문을 가슴에 담는 녀석들 말이죠. 이것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이나 그의 스승 창과도 맞닿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삶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는 ‘습관’이라는 것에 반기를 든 선구자들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책에 대해서 토론 중에 한 친구가 실제 레밍의 습성을 이야기 하면서 ‘자살소동’ 자체가 허구인데 그것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진행을 맡았던 분이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건네 주셨죠.

“가끔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이라는 이야기를.

살면서 사람은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곤 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 그런 때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럼에도 주저하고, 고민하고, 술 마시게 되죠. 아무래도 그런 순간에 나이가 있고, 똑똑하다는 이들이 더더욱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고민거리를 짊어지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는 오히려 아는 것이 짐이 되고 괴로움이 되는 법이니까요.

가보지도 않은 길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배움이 적다고 느끼는 이라면 ‘겁없이 베팅할 권리’를 가슴 속에 품게 됩니다. 그들에게 아직 세상은 딜러에게 방금 받은 패처럼 따끈따끈 한 것이니까요. 그런 권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행사하지는 않죠.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
(루돌프 폰 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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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 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 뿌리가 눕는다


(김수영:1974)

++++++++++++++++++++++++++++++++++++++++++++++


현상소를 하다 보면 수많은 필름을 통해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수없이 많이 들어오는 손님들의 필름을 통해 간절곶과 외도(外島)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지요.

비록 늘 현상기 앞에 묶여 있지만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헝가리 체코 프랑스 영국 일본 태국 브라질 칠레... 세상에 안 가본 나라가 없어요 ^^

하지만 때로는 별로 반갑지 않은 장면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 [병원사진]으로 이름 붙여진 그 필름들은 참으로 난감한 것들이었습니다.
주로 사진관 건너편에 있는 외과 병원과 비뇨기과 의원에서 맡겨지는 것인데요이 필름들은 항상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정말 대단한(?) 장면들이니까요.

비뇨기과의 사진들은 그야말로 '엽기'라는 말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주로 슬라이드 필름인데... 성기확대에 관한 아니 성기학대(?) 라고 이름 붙여질만한 사진들이죠. [남성의 고민]과 관련된 사진입니다.
맞아요! 다 큰 남자들은 늘 그게 고민이죠 후후후...


정상적인 시술 과정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찍어
결국 침소봉대(?)에 이르는 행복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간혹, 야매(?)로 받은 확대 수술의 부작용과 관련된 치료 과정을 담은 사진은 참으로 처절 하답니다. 왜 남자들은 [남성의 희소식] 앞에 이리도 무모 할까요? ㅋㄷㅋㄷ

한편 외과에서 나온 사진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의사가 경찰 검안의를 겸하는 통에 사망사고 부검 사진이 자주 나옵니다.

제가 사는 해운대 지역의 각종 사망 사고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진이증거용으로 쓰이기 위해 우리 사진관에서 현상/인화됩니다.

오토바이 배달하던 어느 피자 배달원의 죽음, 무슨 고민이 컸는지 20층에서 내린 초등학생의 몸뚱아리, 부부 싸움하고 홧김에 현관에 목을 맨 새댁,

(퇴근해서 현관으로 들어서던 남편이 참 놀랬을것 같더군요)

일주일 전에 손주랑 필름 맡기로 오셨던...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일때는 또 얼마나 가심이 아픈지..휴!~


그리고 버스 바퀴에 깔린 6살 어린이의 으깨진 가슴....

사망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발견되지 못한 어느 독거노인의 잔해와 구더기....

아직도 제 머리에는 수많은 사진들의 잔혹한 잔영이 남아 있습니다.

포토퀵 홈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고용한 배달원들은밤이 되면 지킬박사의 하이드씨 처럼 폭주족으로 변신하는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 참 말을 안들어요.

특히 헬멧 쓰라고 하면...악을 쓰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병원사진] 중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뚜껑'이 열린 장면을 보여주면 얼마간은 스스로 헬멧을 쓸 정도 입니다. -.-;;

전에 일하던 현상기사 중에선 [병원 필름]은 접수 봉투 껍데기도 안 만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그랬는지, 비위가 약해서 그랬는지 사진을 챙기다가 어쩌다 병원 사진을 보면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기도 했지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진들입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목을 맨 어느 청년의 주검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허름한 옷차림의 막노동꾼 모습으로 야산에서 목을 맸더군요.

[병원 사진]들 중에서 목을 맨 주검은 오히려 평범한 경우이지만 이건 좀 달랐습니다. 그 청년의 주검 사진을 살펴보다가 [그 사진] 때문에 저는 거의 가슴이 터질 뻔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이 필름에 얼룩을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눈물이 부끄럽기도 하고 도저히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작업을 잠시 멈추고 저는 상가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내려보고...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한참을 배회하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때는 아마도 98년 늦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절적으로 노가다 일감이 끊길 무렵이지요.

게다가 IMF 한파가 한창 몰아쳤고, 건설 경기는 말 그대로 곤두박질치던 때였습니다. 의사의 카메라는 나무에 매달린 그 주검과 주변이 함께 보이는 장면부터 시작하여주검으로 다가가 목덜미 부분을 앞 뒤로 클로즈업하고그 나무 주변에 흩어진 신발, 소주병 같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경찰들이 끈을 풀어 시신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옷을 벗깁니다.

질식사임을 확인하기 위해 형사 한 명이 시신의 성기를 마치 치약 짜듯 움켜쥐어 정액 유무를 촬영하고, 시신을 뒤집어 똥이 묻은 항문을 주변을 클로즈업한 사진으로 마무리됩니다.


여기 까지가 여느 검안 사진들의 일률적인 레파토리(?) 입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주검에는 바로 [그 사진]이 한 컷 더 남아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노가다들이 많이 사용하는, 손바닥에 빨간 고무칠이 된 목장갑을 낀 채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장갑을 벗기고 굳어진 손바닥을 펴자 그 바닥에 글씨가 있었습니다. [손바닥 사진]이 바로 저를 울게한 사진 이었습니다.


그의 검고 거친 손바닥에는 까만 매직으로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힘들어서요


삐뚤삐뚤한 그것은 13 글자의 유언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제 갓 20대 후반의 한 젊은이의 어깨를 이토록 짓눌렀는가?

마지막까지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했건만... 소주 한 병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생각이 더 이어지지 못하고 그저 막막한 가슴에 눈물만 났습니다.

늙은 어머니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날카로운 상처와 둔중한 아픔을 남기고 가신 당신... 너무한 거 아닙니까?

******************

어느 것 하나 위로가 되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을 홀로 등진 당신! 오늘 당신을 추모 합니다.

제게 남은 시간, 이 아픔을 간직하며 꺼진 연탄재 만큼의 온기라도 나누며 살겠습니다. 미안 합니다.

2003. 9. 10

출처 : 레이소다 덕헌님(http://www.raysoda.com/badak)



솔직히,

고작 한 줄의 글에 이렇게 무너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습니다.

사진 한 장에 희망이 담길 수도 있지만 그만큼의 절망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 카메라를 쥐고 있는 그 순간에도 사회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지금 사진기를 쥐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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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스튜디오의 1994년 작품인 平成狸合戰ポンポコ(폼포코)는 낙천적이고, 그저 자신의
땅을 지키고 살아가길 바라는 너구리(일본 전래동화에서 흔히 너구리는 변신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들이 자신의 산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공격'해오는 인간들에 대항해
자신들의 방식대로 싸우는 모습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결국, 그들의 '순진한'작전은 처참하게 부서지고, 그 와중에 인간들은 너구리들의 작전을
자신들의 사업의 발판으로 만드는 약싹빠름까지 보여준다.

영화의 절정부에 너구리들의 마지막 힘을 모아 살풍경한 도시 풍경을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장면에선, 너구리들이나 인간들이나 결국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었음을 보여주지만
결국 너구리들에게 그것은 이미 늦은 일, 변신할 수 없는 너구리들은 그저 도시에 기대어
살아가는 군식구로 전락하고, 변신할 수 있는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변하여 살아가게 된다.

영화 마지막에 깔리던 이 곡의 밝음이 오히려 슬프게 들린 경험을 하면서,
영화 속의 너구리나 별 다를바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진정 인간답게 사는 것은 결국 모든 자연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 그것이리라.



いつでも誰かが
언제든지 누군가가 - 平成狸合戰ポンポコ Ending Title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いつでも誰かが きっとそばにいる

생각해 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思い出しておくれ すてきなその名を

마음이 울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心がふさいで 何も見えない夜

꼭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어.
きっと誰かがいつもそばにいる

태어난 마을을 멀리 떠나있어도
生まれた街を 遠く離れても

잊지 말아 주세요. 그 마을의 바람을
忘れないでおくれ あの街の風を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いつでも誰かが きっとそばにいる

그래 꼭 네가 언제든 곁에 있어.
そうさきっとおまえが いつもそばにいる

비오는 아침엔 도대체 어떻게 해.
雨の降る朝 いったいどうする

꿈에서 깨어나도 역시 외톨이야.
夢からさめたら やぱり一人かい

언제든지 네가 꼭 옆에 있어.
いつでもおまえが きっとそばにいる

생각해 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思い出しておくれ すてきなその名を


싸움에서 상처입고 빛이 보이지 않으면
爭いに傷ついて 光が見ないなら

귀를 기울여봐요. 노래가 들려와요.
耳をすましてくれ 歌が聞こえるよ

눈물도 아픔도 언젠가 사라져 가.
淚も痛みも いつか消えてゆく

그래 꼭 너의 웃는 얼굴을 원해.
そうさきっとおまえの 微笑みがほしい


바람부는 밤엔 누군가를 만나고파.
風の吹く夜 誰かにあいたい

꿈 속에서 봤지. 너를 만나고파.
夢に見たのさ おまえにあい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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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알라를 믿는 사람이건, 부처를 믿는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기댈 하늘은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성호를 그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 지구 어느 곳에서는 눈을 뜬 그 순간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새벽을 깨우는 목어소리에 합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기원한다, 모쪼록 세상이 서로의 다름을 탓하지 않고 서로 같은 부분에서 화해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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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에는 열사묘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묻힐 공간이 훨씬 넓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공동묘지 중 하나일뿐이다. 묘비마다 각자의 사연이 적혀있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쉬고 있는 곳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성산 장기려.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는 신구교를 합쳐 10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중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자신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건데, 그런 질문 앞에서
초라해지는 '짝퉁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보편적인 부분이 하나있다.
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그 신이 예수님이건, 부처님이건 의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
어쩌면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벼락을 맞지 않은 것은 장기려
박사와 같은 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기려 [張起呂, 1911~1995.12.25]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일찌기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의사만 만나면 고칠 수 있던 병을 돈이 없어서 악화시키고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는
참담한 현실을 자신의 손으로 고쳐보고자 한 것.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金鳳淑)과 5남매를 북한에 남겨 두고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면서, 그 자신이 애초에 마음먹었던 '뒷산 바윗돌 같은 의사'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전간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의료활동 외에도 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79년,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의 친지로부터 북한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 아래 아내의 편지와 가족
사진을 받은 뒤 재회를 기다렸으나 지병인 당뇨병으로 운명하였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그를 마지막에 찾아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도 병을
고칠 길 없어 마지막 희망으로 그를 선택한 가난한 환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병을 고쳤으면서도 돈이 없어 퇴원하지 못하던 환자들을 병원 뒷 문을
열어주며 도망보낸 박사의 일화는 아직도 남아있죠.
애초에 의사가 돈을 밝히는 것 자체를 죄악처럼 생각했다는 그의 모습에서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오히려 하찮게 느껴집니다.

BGM : 송은경 - 오직 주의 사랑에 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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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空航


살다보면,
만나야 하는데도 못만나는 인연이 있고,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만나게 되는 인연이 있으며,
만나야 하지만 만나서는 안되는 인연도 있었다.

아사코를 이야기한 피천득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내 인생에 여러 인연들을 만나며 곰곰히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마음아프게 한 사람들은 나와 결국 좋던 싫던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이 아니라, 결국 인연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결국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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