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언젠가 우리동네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하던 때,

동네어귀에 붙어있는 후보자들의 포스터를 살펴보다가 낯익은 얼굴들 한 참뒤에 - 기호 8번, 당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란걸 첫 눈에 느낄 정도 - 웬지 뼈있는 글귀를 적어두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아저씨가 보였다.

후보자 연설회때도 그 아저씨는 기호1, 2, 3번처럼 동원된 사람들의 박수 갈채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우루루 빠져나가는 텅빈 공간을 향해 연설을 해야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포스터에 써있던 글귀를 강조했다.

"여러분, 우리가 정치를 멀리하면, 정치도 우리를 멀리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선것은 저의 당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정말 될만한 사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뽑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족속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일본처럼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별로 관심 없어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야만 지들 맘대로 '정치'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까지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모습의 정치를 모여주지 못한 것은 정치가들이 원래 나쁜 놈들이거나 머리가 돌이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탓을 할 줄 모르고 남 탓만 하고 있습니다. 제발 귀가 있으시면 듣고 눈이 있으면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이 모양 이 꼴의 나라판은 그들 탓이 아니라 그런 그릇된 자들을 뽑은 우리 탓이란 사실을."

그 해 선거에서 그 아저씨는 8명의 후보중, 6번째의 득표로 낙선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그렇게 하고자 했던 말들을 가슴에 담았고, 한참 뒤의 대통령 탄핵에 이은 국민들의 심판을 목도하면서 그의 말이 거짓이나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었다.

정말 해야할 말이 있을 때, 그 말을 참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방치하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는 것. 박해를 받고, 아픔을 겪더라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은 잊지 않고 살려고 애써보련다.

...교양과정이 끝나고 2학년이 된 후부터 나는 차차 외교학과 학생에서 단순한 문리대생으로 바뀌고 있었다. 교련반대 학생투쟁이 시작되었다. 학원에서 군사훈련을 시행하겠다는 것 역시 '안보논리'의 연장이었고 나에겐 또한 분열의 그리고 증오의 이데올로기였다. 또 나는 학생대중의 일원으로 열심히 뛰었다.

반군사파쇼독재 및 반교련 학생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어, 급기야 본관 강의실이 학생들에게
농성장으로 점령되었을 때 대학측에서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교수학생간담회'
열었다. 각 과별로 진행되었으므로 나는 당연히 외교학과의 '교수학생간담회'에 참석하였다.

간담회는 “어떻게 하면 외무직 시험에 패스할 수 있는가?”와 “외무직 시험과목이 외교학과보다
법대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시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불만과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그 답변으로 끝났다. 교수도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학생투쟁으로 갖게된 '교수학생간담회'였는데 외교학과의 그것은
'외무직 시험 합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된 것이다.

나 역시 외교관이 돼 보겠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기에 그 욕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교수들까지 그 장단에 춤을 추다니.
적어도 당시의 이슈였던 파시즘과 대학 내의 군사훈련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라도 밝혔어야
옳았다.

그리고 나서 “하지만...... 아직은 공부할 때다”했으면 '교수학생간담회'에 임한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나는 아직 2학년인 주제에 그리고 제 깐엔 무슨 학생운동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는 자격지심에 불쑥 뛰어들어 문제 제기도 못하고 3,4학년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학생투쟁의 현안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교수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때문에 간담회장을 박차고 일어나 나오지도 못하고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간담회 내내 나는 '개똥 세 개'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똥 세 개.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나의 할아버지께선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대부분 잊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신께서 중국의 노신을 읽으시고
좀 바꾸어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옛이야기에 실제로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 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 글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나는 '교수학생간담회'장을 나서며 세 개째의 개똥이 나의 차지라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교수들은 개똥을 먹는 대신에 곧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그 중에는 박정희의 지명을 받아 유정회의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광주항쟁 때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국보위원인가가 된 사람도 있었다.
학문이 미쳤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미쳤던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학문도 나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이 없던, 혹은 문제의식을 기피했던 교수들의 개똥을 먹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홍세화 - 개똥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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