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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想 에 해당하는 글 : 92 개
2006.10.19 :: 讀書三昧 1
2006.10.17 :: 감정의 상호작용 1
2006.10.09 :: 압.구.정.동. 1
2006.10.07 :: 살다보면 1
2006.10.03 :: 시지프스의 신화 1
2006.09.28 :: 1

Photo By Skyraider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In Angulo Cum Libro."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Thomas A Kemp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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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Khiphop  

음악이란 것, 우울한 음악은 우울하게 만들고, 즐거운 음악은 즐겁게 만드는 것에서 착안된
것이 음악요법이라는 정신과 치료 방법이라더군요. 주로 클래식 음악이 이용되는데 최근에는
아예 ‘태교음악’이니 ‘마음을 안정시키는 음악’이니 하여 별의별 음악들이 다 포장되어
나오더군요. 그만큼 음악의 힘이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그저 음악이 하나의 효용가치를 지닌 수단으로만 인식될까 덜커덕 겁나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우울할 때는 절대 밝은 음악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슬프고 아예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버리는 쪽을 택하죠. 그래서 오늘 날, 이처럼
암울한 인간형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그 편이 더 맘을 안정시켜주더군요.
슬픈 음악에 몸을 맡기고 울어버리는 것이 우울하거나 슬플 때의 최선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 덕에 보기와 달리 눈물이 많아지고 곧잘 우는 버릇도 생겨나긴 했지만 슬픔을 계속
담아두기보다는 넘쳐서 빠져나가게 두는게 더 낫다는 판단은 체험적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밝은 노래를 틀어놓고 웃어 젖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쪽이 비정상적이지
않겠습니까?

감정과 감정은 상호작용 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따르면 울음과 웃음이 종잇장 한 장 차이일 따름이며,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유기적으로 묶여있는 개념이라고 전합니다. 잘 웃는 사람이 잘 울고, 잘 우는 사람이 잘 웃는
법이라는 얘기죠. 슬픈 노래를 틀어놓고 슬픔의 극한까지 떨어져보는 것이나 즐거울 때,
큰 소리로 밝은 노래를 부르며 하늘 저 꼭대기까지 UP되어 보는 것도 마찬가지의
‘감정의 상호작용’이라는 고리타분한 법칙이죠.

여러분은 지금 기쁘십니까? 슬프십니까? 아니면 우울하십니까? 즐거우십니까?

BGM : Walk Of Life – Dire Stra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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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 노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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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은행 계좌에서 돈을 찾아 친구들과 양주를 즐긴다.
브리티시 아메리카 타바코사의 던힐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아이들을 데리고 맥도날드에서 코카콜라를 곁들여 외식을 즐긴다.
신문에서 미군부대 이전 반대를 외치는 몰상식한 것들에게
한 마디 퍼부어준다. '미친 것들, 누구 덕에 우리가 살았는데?'

핵폭탄 졸라 쌓아둔 미국은 멋진 강대국이고,
막다른 길에서 폭탄 터트린 북한은 상종 못할 망종들이다.
영어발음을 위해 애들에게 혀 늘이는 수술을 해주고,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영어시험 TEPS를 받게 해주어야 하고,
딸라빚을 내서라도 딴 나라 말고 미국으로 어학연수 보내줘야 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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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0. 7
압구정 갤러리아
Canon EOS 1Ds mark.II / EF 28-70 2.8L

천성적으로 압구정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곳이 한명회가 만든 정자가 있던 곳이라던지, 갑부들의 집들이 모인 곳이라던지 하는 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싫었다.
예전, 서울의 '금싸라기땅'들이 '학군'으로 묶여있던 시절, 우리 집도 저 압구정동과 같은
8학군이었다. 학교에서 '논다.'던 날라리 녀석들이 저 곳에 가서 애들 삥을 양 것 뜯어왔다고
자랑 할 때도, 저기 살던 친구에게 웬만하면 딴데로 이사 가라고 권할 정도로 그저 저 곳이
싫었다.

연휴의 마지막을 아르바이트로 장식하기 위해 찾았던 압구정동, 난 여전히 그 곳이 싫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다.

화려한 네온 속에 저물어가는 그 스산함이 이젠 싫다.

뒷골목 고깃집의 맛난 추억도, 이젠 사라진 텍사스문의 그리움도 이젠 그냥 추억이
되어버린 것,

그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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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의외로 기대하지 않았을 때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럴 듯한 출사를 사진을 얻기 위해 무작정 나간 출사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물에 젖은 스펀지 같은 몸을 지하철 의자위로 던졌을 때, 만난 뚱한 강아지의 표정은
그 날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기대하지 않았을 때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단, 준비되어 있을 때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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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부터 쉴새없이 산 꼭대기로 바위를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오늘도 그런 시지프스들로 세상은 물결친다.

일로 비롯된 속박, 하루 안에 해놓아야할 일의 물결.
여기저기서 발 목을 잡는 약속과 의식의 행렬, 일견 바보처럼 보이는 이러한
일들로 인간사는 세상은 채워져 있었다.

까뮈는 그러한 시지프스도 정상을 향한 투쟁에서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보여준다고 적었지만 난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한 나약한 사람일 따름이다.

어쩔 수 없이 시지프스처럼 살아야할 운명이라면 나도 그런 삶에 대한 갈망과
투쟁을 가지고 살고 싶다. 비록 내가 옮기는 것이 커다란 바위가 아닌 길 가에
구르는 차돌이라도 쉽게,쉽게가 아닌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고, 한 번이라도
더 되돌아보면서 그 바위덩이만큼의 성찰로 정성껏 정상에 오르고 싶다.


...가끔 내가 포기한 것들이 어설픈 잠을 뒤척이듯 내가 떠나온 그 푸른 바다
가 가장 빛나는 곳은 아닐까...(개구장애 - 엘도라도中)

BGM : 개구장애 - 엘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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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노방선교를 하고 계시던 어느 영감님

전철에서, 버스에서..그리고 지나던 길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이들이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무시하고, 어떤 이들은 짜증내고, 어떤 이들은 대놓고 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교회다니는 친구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외치고 다니는걸까?"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

주일마다 미사를 지내는 내 눈에도 자주 거북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행동이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라는 그의 설명 앞에서 나는 잠깐 생각했다.
정말 예수를 믿는 길이란 그런 것일까? 큰 목소리로 '믿어라! 믿어라!'외쳐야만 하는 것일까?
신의 뜻을 인간이 가늠할 수는 없지만, 단지 외치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처럼
편한 일도 없을거라는 얊팍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아도, 교회에서 회개하고 눈물 흘리면 죄사함을 받고,
평소에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살았더라도 '예수'를 영접하면 바로 천국에 이른다는
그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너희는 너희의 믿음을 말로 행하지말고,
행동으로 보여라.'라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귀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잘못했다면 먼저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신 앞에서 회개해야 제대로된
것이 아닐까? 예수를 알기 전 죄를 많이 짓고 살았다면 그를 만난 이후엔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애를 써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입으로만 '예수, 예수..'를 외치지
말고 그 입에 담는 예수처럼 살아보려고 애를 써야 진정 믿음이 아닐까?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근본적인 명령이 주어져 있다.
예수를 믿지 않으니 마귀의 자식이고,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이라고 이웃을 단죄하는 것이
'사랑'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단군상이 짜증난다고 '몰래(당당하다면 대놓고 해야할 일)'
망치로 부숴버리거나, 불상에 붉은 락카로 '사탄'이라고 적는 행위는 결단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방인에게 '이런 믿음을 유다인들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라고 말했던 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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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單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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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
회현동

Canon New F-1 / FD 50mm 1.4 / Fuji NPH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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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부터 39년까지 개발되었던 라이츠의 Leica III…
요즘에도 이 사진기를 들고 사진찍으러 다니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디지털 카메라가 하나의 유행처럼 버지면서 큼직한 D-SLR안들고 다니면
'간지'안나오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사람들의 기량은 그다지 발전되지 못했지만 장비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사진의 발전(?)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바디가 알아서 찍는 Program Mode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이들에게도 구도만 어느정도
나오면 놀라운 현대과학이 알아서 사진을 잡아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구식 카메라에 열중하는 이들이 그와 반대편에 모여있다.
21세기로 접어든 이때 20세기초에 개발된 사진기자재들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 이들 얘기지.

디지털이 은염사진기를 대체할거라는 우려섞인 보도에도 코웃음치며 노출계까지 꺼내들고
어렵게 한 장 한 장을 담고 있는 그들 말이다.
사실 기술적으로 진보한 최근의 기술도 예전의 렌즈기술을 능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능가라고 하기보다는 예전에서 발전된 기술이 현재에도 그다지 발전이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이미 20세기초에 나온 기술이 여전히 렌즈 기술을 좌우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용의 편의성과
신기술로 무장된 카메라라 하여도 사진 자체의 품질을 좌우하는 렌즈는 거기에서 거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100년전 짜이스가 만들어낸 렌즈보다는 최근 만들어낸 캐논이나 니콘의
렌즈들이 더 나을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품질에서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한 세월을
거치면서 품질의 저하가 일어났을 거라는 생각 탓이지만.

여전히 내 할아버지 나이의 카메라들이 손자뻘 카메라..
아니 증, 고손자뻘의 카메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요즘,
나는 다시 예전 카메라로 가볼까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

어찌되었건....
필름이 나가지 않는다고 난사하는 디카족이나 한 장에 수 천원하는 슬라이드 필름을
바들바들 떨면서 찍는 필카족들이나 모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모쪼록 서로의 세상을 인정하면서 다투지 말고 즐거운 사진생활 하기만을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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