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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후배 동준의 영화 촬영에 동원된 선배들.
다들 번듯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나만 빼고) '우리 인생에 영화 찍힐 기회가 몇 번 되겠냐?'
는 각오하에 다들 바쁜 시간 쪼개어가며 열심히 참여 중이다.

메가쇼킹 만화가 고필헌씨와 기자이자, 작가며, 만화가이기도 한 후배 양수.
이번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두 사람의 모습처럼 결말에서 둘의 운명도 엇갈린다.

나? 나는 애초에 어긋나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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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Leica MP / 50mm f1.0 Noctilux / Fuji NPS 160

인사동 거리에 가면 자주보이는 아저씨들.
틈만나면 악기를 꺼내들고 흥겨운 음악으로 거리를 찾은 이들을 즐겁게 해준다.
요즘 인사동에서 뵌 적이 없는데, 혹시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은 아닌지...

그룹 이름은 이글스...분위기상 호텔 켈리포니아라도 불러줘야 하는데 그들은
연주만 열심히 한다.

어느새 인사동의 한 부분이 된 그들, 그들에게 음악만큼의 즐거움이 함께 하길.

BGM : Ole Edvard Antonsen - The Honeymoo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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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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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개를 키우다보면 가끔 녀석들이 확실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물론, 마당 한 켠에 묶여 있어서 아버지나 내가 산에 갈 때나 집을 나서는 녀석이
꿀 꿈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주인만보면 좋아하다가도 가끔 빤히 내 눈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음을 알려올 때, 나는 깜짝 깜짝 놀란다.

...나도 가끔 잊고 사는 것을 녀석들은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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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네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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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Ernst Wilhelm Wenders

다큐멘터리 영화 "Buena Vista Social Club"은 여러가지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다.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던 천재 뮤지션들을 물 위(서방세계)로 끌어올린 것도
그러했지만, 영화 속에 비치던 영감님들의 순진하고 밝은 모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행복이었으니까.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연애하고 싶다.'를 외치던 꼼바이 세꾼도.
돈이 없어서 물고기를 잡고 돌아온 어선의 그물에 붙어있던 고기들을 떼어먹는 삶을
살면서도 늘 신께 감사한다던 이브라힘 페레.
피아노 앞에서나 그냥 밖에서나 어린아이같은 표정을 보여주던 루벤 곤잘레스.
카메라 앞에서나 밖에서나 분위기를 잡으며 늘 웃음을 보여주던 피오 레이바.

이젠 그들은 이 세상에 없고, 그들의 음악만 남아있다.
빔벤더스가 남긴 영화도 영화지만 그가 남겨둔 멋진 노인네들의 사진도 이제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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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의 프로야구선수들 중 외국인들도 많이 있지만 야구가 백인들의 전유물이던 시절, 그때는 미국선수라 할지라도 흑인들은 메이져리그 선수로 뛸 수 없었다. 그 시절 시대를 잘못 타고난 많은 흑인선수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Negro League라는 다른 리그에서 뛰어야만 했다.

1869년 , 최초로 메이져리그팀이 출현했을 때부터 1947년 제키 로빈슨이 최초의 메이져리그의 흑인선수로 등장하기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을 그들은 그렇게 '주변인'으로 보낸 것이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혐오는 결국 흑인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어도 계속 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흑인 중에 뛰어난 선수들이 더 많았으나 그들의 실력에 백인들이 밀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백인들은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적당한 실력'을 지닌 흑인선수를 찾았다.

한 마디로 백인보다는 적당히 떨어지는 선수를 원했던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늘 백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서 뽑힌 것이 '불멸의' 제키 로빈슨이었다. 하지만, 제키는 그런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백인선수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일약 명문 브룩클린 다저스의 핵심선수로 떠오른다.

메이저리그에서 6시즌동안 28승 31패 32세이브, 방어율 3.29

일견 아주 평범한(결코 비범하다고 할 수 없는)성적을 내고도 많은 야구전문가들에 의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선정된 사첼 페이지도 그렇게 시절을 잘못 타고난 대표적인 선수중 하나였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입단한 것은 1948년, 그의 나이가 42살 되던 해였다.

웬만한 이들이면 선수가 아닌 코치나 감독을 할만한 운동선수로써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에 'Player'로 등록된 것이다. 그는 흑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Negro League에서 23시즌동안 2000승을 거두었던 '괴물'이었고(이것은 한 시즌당 100승 가까운 승수를 챙겼다는 얘기다. 등판한 거의 모든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는 얘기)모든 기량을 발휘하며 뛸 수 있던 시기에 흑인이란 이유로 철저히 외면되고 있었던 대표적인 선수였다. 아니, 외면이 아닌 의식되고 있던 것이리라.

그가 이제서야 '한 물'가고 만만해졌다고 생각한 구단들은 흑인들이 메이저리그로 슬슬 진출할 무렵인 1948년이 되어서야 헐값이 적혀있는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모든 흑인들의 꿈이 메이저리그였던 것은 당연지사, 그는 기꺼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첫 해,  그를 받아줬던 클리블랜드는 월드 시리즈에 오른다. 하지만, 월드시리즈 마운드에서 승리투수가 될 수 있던 페이지를 팀은 월드시리즈 주전 엔트리에서 빼버렸고, 겨우 '패전처리투수'로 한 번 기용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같은 팀이면서도 백인들은 그렇게도 흑인에게 월드시리즈 승리투수의 영예를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한 불평등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1953년까지 지켰고(50년 독립리그로 잠시 외도하였다가 51년, 다시 지금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복귀, 45살의 나이에 12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한다) 59세가 되던 1965년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의 유니폼을 잠시 입고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 깜짝 등판, 3이닝을 완봉하는 '환갑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솔직히 난 이 흑인선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못했었다. 그런데..예전 Triple Play 2001이라는 전자오락 게임에 열중하다가 거의 칠 수 없는 마구를 던지는 상대편 투수를 게임 중에 만났고 그의 이름이 Satchel Paige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MLB사이트를 뒤져서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에 대해 알아냈다.

당연히 최초의 메이저리그 흑인 선수라는 영예를 '너무나도 출중한 실력'때문에 빼앗겼던 그는 1971년 니그로리그 출신 선수중 최초로 명예의전당(Hall Of Fame)에 헌액되었고 1982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라.
포기하고 슬퍼하지도 말라.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그리고 일이 순조로울 때 기도하지 않았다면
근심이 생겼을 때도 기도하지 말라.

Never let head hang down.
Never give up and grieve.
Find another way.
And don't pray when it rains
if you don't pray when the sun shines.

- Satchel Paige -


BGM :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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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kyraider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슬픈 노래 날 위해 부르지 마세요
무덤가에 장미꽃도 심지 마시고
아무것도 심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슬픈 음악 날 위해 만들지 마세요
무덤가에 백합꽃도 심지 마시고
아무것도 심지 마세요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대가 돌아서 가도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어요

아푸른 잡초가 무덤 위에서 이슬에 젖을지라도
그대 기억나시면 잊어요
아무말 말고 잊어요, 잊어요, 잊어요.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대가 돌아서 가도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어요
아무 말 없이 웃어요, 웃어요,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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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한물 가버렸지만 헤비급 복싱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등 불세출의 복서들도 많이 탄생했던 가장 무거운
남자들의 스포츠 헤비급 복싱...마이크 타이슨을 정점으로 하여 한물 가버린 그 곳에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복서가 한명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로
꼽히는 챔피언이죠. 그의 이름은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

예전에 사각의 링의 왕좌를 차지한 이들은 그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도 많은
팬들의 귀감이 되곤 했습니다. 노예의 성을 버리고 조상의 이름을 찾고 부당한 전쟁에 맞써서
참전불가를 외쳤던 무하마드 알리도 있었고 목사로 변신,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다시 글러브를
끼었던 노인복서 포먼도 있었지요.

하지만, 불한당과 같은 타이슨의 등장 이후 모든게 변해버립니다.
누구보다도 강할지는 모르지만 그 주먹을 링 밖에서 휘두르는 만행도 서슴치 않는 '복서'아닌
'깡패'의 등장은 헤비급 복싱의 사양길을 부채질 합니다.

록키 마르시아노(Rocco Francis Marchegiano : 1923.9.1~1969.8.31) 
"The Brockton Blockbuster.  Rocky , Marciano"

미국의 프로복싱 선수.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미국 출생의 이탈리아계(系) 백인으로 1947년 3월 17 일 프로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 J.왈콧으로부터 세계 타이틀을 빼앗고, 1956 년 무패의 기록으로 은퇴할 때까지
6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하였다.
저지 조 월 콧, 조 루이스와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할거하던 시대였으나 그들을 모두
무릎꿇리며 세계 헤비급의 역사를 장식했던 백인 챔피언이다.
1959년 복싱 전당(殿堂)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9년 8월 31일, 자신의 생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전적은 49전 전승 43KO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다운당한 적 없고(사실 한 번 있었지만 거의 슬립수준이었죠) 근소한 차이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완벽한 복서였습니다.
엄청난 펀치력에 타고난 스테미너, 집요한 연타능력으로 여섯번의 판정경기에서도 전원일치의
판정을 얻어냈죠. 그가 백인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지만 그도 흑인만큼이나
미국 사회에서 푸대접받던 이탈리아 이민의 자손이었습니다. 세계 복싱사상 상대가 없어서
은퇴를 결정한 이도 그가 최초였죠. 라이벌이라고 말할 사람조차 나오지 못했죠.
불세출의 강자. 그것이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와 무하마드 알리를 모델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록키'죠.
역시 이탈리아 이민의 자손인 스텔론은 이 영화에서 두들겨 맞으며 '아메리카 드림'을
선보입니다만 정작 진짜 록키는 두들겨맞기 보다는 패는 쪽에 능한 복서였습니다.
권투를 좋아하지 않지만 헤비급에 그와 같은 강자가 다시 나타난다면(타이슨 같은 양아치
말고요)다시 채널을 맞추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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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9
Photo By Skyraider
Nikon F3hp / AF 80-200 2.8D / Kodak TX 400(800 up)


늠름한 자태로 사진기를 응시하던 녀석.
작지만 영민해보이는 녀석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녀석을 찍은 것이 아니라 내가 녀석에게 찍힌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뒤이어 다가온 이유없는 쓸쓸함.
아마도 늘 주변에 머물러야할 녀석의 숙명이라고 할까.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르지만,
다시 만날 날까지 안녕. 안녕. 안녕.

BGM : Camel - Long Goodb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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