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中(우중)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씨 무얼했죠? 집을 지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1982. 7.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