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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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에는 열사묘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묻힐 공간이 훨씬 넓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공동묘지 중 하나일뿐이다. 묘비마다 각자의 사연이 적혀있고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쉬고 있는 곳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성산 장기려.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는 신구교를 합쳐 10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중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자신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건데, 그런 질문 앞에서
초라해지는 '짝퉁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보편적인 부분이 하나있다.
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그 신이 예수님이건, 부처님이건 의인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
어쩌면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벼락을 맞지 않은 것은 장기려
박사와 같은 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기려 [張起呂, 1911~1995.12.25]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일찌기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의사만 만나면 고칠 수 있던 병을 돈이 없어서 악화시키고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는
참담한 현실을 자신의 손으로 고쳐보고자 한 것.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金鳳淑)과 5남매를 북한에 남겨 두고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면서, 그 자신이 애초에 마음먹었던 '뒷산 바윗돌 같은 의사'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전간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의료활동 외에도 부산대학교·가톨릭대학교·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79년,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의 친지로부터 북한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 아래 아내의 편지와 가족
사진을 받은 뒤 재회를 기다렸으나 지병인 당뇨병으로 운명하였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그를 마지막에 찾아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도 병을
고칠 길 없어 마지막 희망으로 그를 선택한 가난한 환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병을 고쳤으면서도 돈이 없어 퇴원하지 못하던 환자들을 병원 뒷 문을
열어주며 도망보낸 박사의 일화는 아직도 남아있죠.
애초에 의사가 돈을 밝히는 것 자체를 죄악처럼 생각했다는 그의 모습에서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오히려 하찮게 느껴집니다.

BGM : 송은경 - 오직 주의 사랑에 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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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空航


살다보면,
만나야 하는데도 못만나는 인연이 있고,
만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만나게 되는 인연이 있으며,
만나야 하지만 만나서는 안되는 인연도 있었다.

아사코를 이야기한 피천득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내 인생에 여러 인연들을 만나며 곰곰히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를 가장 마음아프게 한 사람들은 나와 결국 좋던 싫던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이 아니라, 결국 인연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결국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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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北海島

친구가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엄청난 사진들을 들고 와서 집에서 스캔을 하고 있다.
여행....따로 방랑벽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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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변호사 앤드류(톰행크스)가 AIDS환자라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회사에서
잘린다. 그 자신이 변호사였지만, 그의 몰골을 보고 다른 모든 변호사들은 그를 외면하고,
결국, 한 때는 법정에서 자신과 싸우던 경쟁자 조 밀러를 찾아가지만 그에게도 외면받는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중, 흑인인 자신과 AIDS환자인 그가 똑같이
'굴러온 돌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밀러는 비로소 그의 변론을 맡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그에게도 가슴에 박혀있는 동성애자와 AIDS에 대한 편견은 존재했고,
한 사람은 병마와, 한 사람은 편견과 싸우는 전쟁이 소송과 더불어 시작된다.

1993년에 나온 영화 필라델피아는 많은 이들에게 '당신은 게이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발칙한 영화'였다. 영화 속에서 조 밀러(덴젤 워싱턴)가 극중 인물들에게 쉴새 없이
던지는 질문인 '당신은 게이입니까?'는 "우리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는 극중 외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 해서 '나와 다른 것 = 나쁜 것'이라는
초딩적인 이분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가 울려퍼지는 순간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순간, 완전히 이해되지 않던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비로소 '나와 같은 사람'으로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BGM : La Mamma morta(From The Opera Andrea Chenier : Umberto Giordano)
      - Sop. Maria Ca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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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中(우중)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씨 무얼했죠? 집을 지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1982. 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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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71학번으로 동기였던 두 아가씨가 운명적으로 만나,
'우리 대학 생활동안만 노래하자.'라고 약속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전국의 대학가는 축제 때마다 그녀들을 부르기 위해 난리가 났다.
지금도 그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김민기, 이장희가 대부분의 그녀들이 부른 곡을
맡아주었고 -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외국 노래를 번안한 번안곡의 비율도 컸지만 - 첫 약속을
끝까지 잊지 않고 정말 졸업과 동시에 듀엣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간 그들이
발표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이 바로 이 음반이다.



...1971년 서울대 미대 신입생 환영회때 회화과 대표로 노래부르고 싶은 두명의 여학생이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이화여중고를 나온 대구출신 이현경과 숙명여중고를 나온 박영애였다. 장기자랑을 위해 몇일동안 연습하여 결성한 여성포크듀엣 <현경과 영애>.

너무도 순수하고 티없이 맑았던 노래들은 70년대 유신정권의 답답한 사회분위기와 불확실한 미래로 시퍼렇게 멍든 젊은 지성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던 세레나데였다.

저항적 색깔이 강하게 내재된 김민기의 노래들이 청년들을 한마음으로 이끌었던 힘찬 선봉대였다면 <현경과 영애>의 멜로디는 상처입은 마음을 자상한 누이처럼 푸근히 어루만져준 후방의 나이팅게일이었다.

'단순한 노래였지만 암울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영혼을 감싸안는 한곡 한곡을 절실하게 불렀다'는 현경과 영애. '순수 아마추어가수로 대학4년동안만 활동하며 소중한 추억을 남기자'는 시한부 활동약속을 했던 서울대 미대생들이었다.

직업가수로의 유혹과 팬들의 아쉬움앞에 다소 흔들리기도 했지만 4년간 불렀던 노래들을 모아 데뷔앨범이자 졸업기념으로 단 1장의 독집음반을 세상에 남기곤 미련없이 본연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 너무도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을지로에서 양복점을 경영했던 부친 박창용과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이었던 모친 이은남의 1남2녀중 둘째로 태여난 박영애. 일제시대때부터 동요작가 윤석중과 함께 노래모임에 참여하며 최승희 무용단원으로 활동했던 어머니의 영향은 지대했다.

초등학교때부터 피아노를 친 그는 KBS, 기독교방송 어린이프로에 나가 '엘리제를 위하여'등을 연주했을 만큼 음악신동이었다. 대학때는 그림 무용 노래 연극 암벽등반 등 못하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재주꾼으로 통했다.

부친이 군장성 출신이였던 이현경은 음대진학까지 고려했을 만큼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던 자존심 강하고 고집센 학생이었다. 두사람은 대학입학 몇개월전부터 기타를 배우며 팝송과 포크음악에 심취했다. 성격은 너무도 판이했지만 두사람이 빚어낸 맑고 깨끗한 화음은 서로를 존중해 주며 전혀 트러블없이 7년간 단짝으로 붙어다니게 만들만큼 아름다웠다.

당시 서울대 미대는 대학가 최대의 프로급 아마추어가수들의 집합장. 우선 포크의 전설 김민기가 소속된 <도비두>와 록그룹 <엑소더스>, 그리고 김아영, 최분자로 구성된 <두나래>가 유명했다.

선배 김민기는 현경과 영애의 깨끗한 화음에 마음을 빼앗기며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얼' PD에게 소개했다. 방송출연 소식을 들은 미대 동창생 김덕년도 슬그머니 데뷔곡이 된 '얘기나 하지'라는 자작곡을 건넸다.

이후 이장희 윤형주 강근식 등과 친분을 쌓으며 레코드녹음과 라디오프로에 출연하는등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주요 레퍼토리는 김민기 김의철 조동진 김광희등 비상업적인 작곡가들이 만든 창작곡들과 자신들이 즐겨부르던 팝송이었다.

음악친구들의 공연때는 늘 백코러스를 자청하여 '우', '와'하는 화음을 많이 넣다보니 <더 와우스>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제법 대학가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업소출연 유혹이 뒤따랐다. 하지만 친분이 있는 이장희나 어니언스의 리싸이틀 공연이나 대학축제무대만을 고집하며 상업적인 어떤 제의도 거절했다.

다만 절친한 사이였던 어니언스 멤버 이수영의 간청은 거절하지 못하고 단한번 대학3학년 겨울방학때 대구의 생맥주홀에서 한달간 공연을 했다. '서울서 현경과 영애가 내려온다'는 소식은 대구 경북지역대학생들을 들뜨게했다. 학생가수로는 거금인 14만원의 수고비를 받았을 만큼 현지 대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박영애는 '나이가 든 어느날 들어도 맑고 깨끗한 영혼과 빛을 잃지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며 자신들이 추구한 음악적 색깔을 고백했다. 이들이 부른 '아름다운 사람'은 김민기조차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노래'라고 감탄했다.

서울대에는 '현경과 영애 음악듣기 모임'이 생겼을 정도. 화려한 화음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단순한 화음이 맑고 긴 생명력을 지닌다'며 늘 아껴주었던 성음레코드의 나 사장은 졸업기념 음반제작을 제의했다.

세션은 친하게 지냈던 동방의 빛이, 음악친구들과 우연히 들렸던 쟈니브라더스의 김준 등이 화음을 자청했다. 불멸의 명곡 '아름다운 사람','그리워라'등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10곡이 수록된 유일한 독집앨범 <현경과 영애-대도,DSO0040,74년11월30일>은 마니아들이면 누구나 소장하고픈 고가희귀음반으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당시는 서슬이 시퍼렇던 음악적 암흑기. 녹음해두었던 김의철곡 <저하늘에 구름따라> <마지막 교정>과 조동진의 <마지막 노래>등이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불손하다'는 등 온갖 이유로 금지가 되면서 기념앨범에서 제외된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조동진의 <마지막 노래>는 <다시부르는 노래>로 제목을 바꾸어 불렀을 만큼 가장 사랑했던 곡이었고 <작은배>녹음때도 백코러스로 참여했다'고 박영애는 회상한다. 앨범수록곡은 아니지만 박영애와 고영수가 함께한 '둘이서 부르는 노래'도 재미있는 포크곡.

77년 재일동포 의류 유통 사업가와 결혼을 해 일본 교토에 거주하며 네아이의 어머니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현경과 자아를 키우며 미술작업에만 전념하며 대학강단에 서고있는 박영애.

85년 연락이 끊긴이래 16년만인 지난 5월 재회를 한 두사람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의 노래를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음에 감격하며 그들을 위한 작고 소박한 음악회를 꿈꾸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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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40년을 바다에서 지낸 바다 사나이다.
어려운 월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기울대로 기운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해양대를 지원하고, 바다로 가는 험한 길을 택했던
사람이었으며, 늘 가족을 가슴에 품고 기어이 집안의 기둥을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다.

2.
그녀는,
오남매의 집에 맏며느리로 들어와 바다에 나가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삼형제를 낳아기른
당찬 '아줌마'다. 그 자신이 대장암에 걸려서도 뇌종양에 걸려 신음하던 맏아들을 기어이
살려냈고 그러면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온몸에 짊어지고 오늘까지도 남편이 세운 집안의
기둥을 더받치고 있는 서까래와 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3.
그는,
어려서부터 늘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착하게 사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가 되어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그처럼
자신의 모습을 초지일관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다. 큰 병을 연이어
앓으면서도 늘 자신의 삶을 신께 의지하며 기어이 그 병마들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이.

그는, 나의 하나 뿐인 형이다.



이들과 나와 지금까지 함께 지낸 시간은 정확히 같다.
그 기간만큼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들.
나는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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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뇌성벽력이 치던 여름 나절,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 회선이 두 번씩이나 불통이 되었습니다.
당장,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답답한 '넷중독자'인 저는 조바심부터
났었다죠. 그 비를 뚫고 집으로 찾아오신 아저씨, 컴퓨터를 살펴보시더니 집앞
전봇대에 오르셨습니다. 일이 그 쯤되니 걱정부터 되더군요.
이 비가 오는데, 이 벼락이 치는데 전봇대에 올라가는 아저씨가 걱정스러웠습니다.
다행히 홈빡 젖어서 엄지손가락을 흔들어주는 아저씨. 인터넷은 연결되었고, 아저씨는
냉수 한 잔 청해 드시고는 다시 다른 집으로 떠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돈을 지불하고 쓰는 인터넷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일을 하는 이들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은 잊고 있었습니다.

...궂은 날이 지나고 잠시 비가 그치자 그새 전기 보수 공사에 나선 또 다른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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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은 굵고 큼직한 근육이나, 덩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던 아나운서 정은임.
그 가녀리고 호리호리한 몸에 어쩜 그런 힘을 담을 수 있었을까.
몇 평 되지 않는 방송국 쪽방에서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지만
아직도 그녀에 대한 많은 이들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는 밤은 오네
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을 지녔네

박정대 -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BGM은 그녀의 프로그램이었던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의 시그널로 쓰였던 곡중,
가장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는 곡인 Mark Knopfler의 Wild Theme입니다.
영국영화 Local Hero의 삽입곡이죠.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 곡만 들으면 그녀생각을
한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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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이들의 노래를 구해다 듣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핀랜드 그룹과 미국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러시아 인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룹, 적군합창단.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노래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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