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낯익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 남자, 이름은 Mike Marshall.
메이저리그 덕후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이 양반은 그야말로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다. 

1943년생이니 만으로 71살, 196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데뷔하여 디트로이트, 시애틀, 휴스턴, 몬트리올, 로스엔젤레스, 아틀란타, 텍사스, 미네소타를 거쳐 뉴욕 메츠에서 1981년 은퇴한 그는 다저스 소속이던 1974년, 사이영상을 수상한 투수였다. 

1974년은 톰 시버(어메이징 메츠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선발투수), 필 니크로(너클볼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전설적인 투수. 얼마전 해체된 고양원더스 허민 구단주의 너클볼 스승으로 우리나라엔 더 잘 알려져 있음)등 당시 20승을 넘나들었고 지금은 그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은 괴물 투수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15승 12패 21세이브 방어율 2.42라는 성적을 올리며 사이영상 수상자가 되는데 그 이유가 대단하다. 선발로는 단 한 차례도 뛰지 않고 오로지 불펜에서만 저런 성적을 올렸다는 것. 

마무리 투수가 한 이닝을 책임지는 지금과 달리 당시는 2~3이닝을 막는 것이 예사였고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등판해 106번 등판, 83번 경기를 마무리하는 철완을 과시했다. 게다가 그는 속구를 주무기로 한 정통파 투수가 아니라 지금은 투수 어깨를 망가뜨리는 최악의 구질로 이름난 스크류볼을 주무기로 삼고 있는 기교파 투수였지만 단명하던 대부분의 스크류볼러와 달리 20여년의 기간내내 리그를 씹어먹는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정말 대단한 점은 야구와 학업을 병행하며 1978년, 운동생리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지금도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에서 절정을 찍는다. 심지어 직접 마운드에서 구질을 자유자재로 던져가며 구구절절 설명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 아래 링크를 누르면 그가 직접 웃짱을 까고(!)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도 80마일대 속구와 전성기때와 별 차이 안나는 스크류볼, 싱커를 던져주고 있는데...보는내내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http://youtu.be/UUgQXJlTS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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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의 심장, 안필드에서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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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

모쪼록 이번 가을의 주인공으로 날아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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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어떤 스포츠용품 회사의 홍보문구지만, 저 말만큼 스포츠를 잘표현한 말은
없을거란 생각이 든다. 인간이 펼치는 극본없는 드라마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스포츠일테니. 가끔은 '스포츠'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라는 세포의 유기적인
운동으로 살아움직이는 생명체 같단 생각도 드니.


Special Thanks Nueva Cancion
BGM : Boston Pops Orchestra - Le Regiment De Sambre Et Meuse
(舊 MBC 스포츠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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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활동 중인 카페인 바람구두의 문화 망명지에서 활동 중이신 믹폴리님이 적어주신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강팀 'Celtic FC'의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믹폴리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해서 오랜 시간 응원해 온 팀도 있지요.
망명지 가족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떤 운동종목을 좋아한다는것은 개인취향의 문제이므로
좋아하시는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겁니다.

하지만 여기 망명지 가족 여러분이라면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할 수 밖에
응원할 수 밖에 없는 클럽이 있습니다.

스코틀란드리그 소속의 Celtic FC입니다.

약자를 위해 태어난 클럽

월프리드 수사님

글라스고 매리스트 수도회의 월프리드 수사는 1888년 당시 글라스고지역에서 사회적
약자로 배척당하고 있던 아일란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 셀틱에프씨를 창단합니다.

당시 영국에는 축구클럽들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축구가 노동자들의 여가로 자리잡아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축구클럽의 창단으로 산업도시 글라스고에서 '촌놈'이라며 멸시 받고 저임금에 시달
리며 배척당하던 수많은 아일란드 이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아일란드 이주민들뿐만아니라  길거리에서 굶어죽어가던 노숙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셀틱 클럽의 수익금을 통해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실업자들 역시 셀틱파크(셀틱구단의 홈경기장) 를 건설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죠.

셀틱은 그렇게 사회적약자를 위한 축구클럽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며 탄생했습니다.

또한, 셀틱이란 말은 아일란드와 스코틀란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주 : 셀틱이란, 켈트족의 후예임을 뜻하는 말이죠)
셀틱은 글라스고에 만연해있던 아일란드 배척주의를 넘어서 글라스고안의 모든 사람 나아가 인류의 모든 이들은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음을 이념으로 내건 구단이었던거죠.
(여러분이 잘아시는 미국의 농구단 보스턴셀틱스도 셀틱에프씨의 전례를 보고 보스톤에 이주해있는 아일란드인들과 보스턴의 약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농구구단입니다.)

셀틱 에프씨는 아직도 전세계 약자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것으로 유명합니다.
매 시즌 중간이나 전 후에 열리는 기념경기 수익금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고있으며
이는 팀의 창단 이념이고 전통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위대한 서포팅 . 셀틱 서포터즈.

훌리건! 축구장의 폭력배들이죠.

최고의 팀이라 불리는 잉글란드 대표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레알마드리드, 올림피크
리옹, 에이씨밀란, 유벤투스... 이런 팀들도 훌리건이 존재합니다.
케이리그에도 훌리건이라 볼 수 있는 과격 서포터들이 존재하고 훌리건이 존재하지
않는 팀은 아마 찾아보기가 힘들겁니다.

하지만 여기 단 한명의 훌리건도 용납하지 않는 위대한 서포터들이 있습니다.

셀틱에프씨의 서포터들입니다.

2003년 스페인 세비야.
셀틱에프씨는 포르투갈의 FC포르투와 UEFA컵 결승전을 가졌습니다.
당시 머나먼 스페인까지 모여든 셀틱의 서포터들은 공식적인 집계로만 8만명이었고
비공식적으로 10만이 모였었죠. 하지만 이 결승전이 열린날 셀틱 서포터들은
단 1건의 불미스러운 사태도 일으키지 않고 전세계축구사 최초로 체포된 서포터 0명을
기록했습니다. 그해 셀틱서포터들은 피파선정 최고의 서포터즈 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질서정연하고 축구에 대한 그대로의 사랑이외에도 셀틱서포터들이 위대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약자를 위해 행동하는 서포터즈

아일란드는 질곡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셀틱서포터들은 아픔을 잘알고있기에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지지합니다.

스페인내전때 셀틱서포터들과 셀틱구단은 공식적으로 정의를 위해 맞서 싸우는 모든이
들을 위한 성명을 냈었고, 실제 많은 셀틱서포터들이 내전에 참전했습니다. 파블로네루
다의 망명시절에도 셀틱서포터들은 공식적으로 네루다를 위한 성명을 냈고 그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죠.(이건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네루다가 셀틱을 좋아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피노체트에 의해 아옌데가 물러났을때 전세계 셀틱팬들은 칠레를 위해 공식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셀틱서포터들은 미국식 에프티에이와 자본주의에 의해 삶이 망가진 멕시코의 농민 혁명군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바스크인들의 독립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했고 까딸루냐 인들을 위해 공식행동했으며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위해 아직도 성명을 내고 그들을 위한 기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의 상크트파울리와 같은 창녀 노숙자들을 위한 클럽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고
셀틱서포터들과 구단의 기금 셀틱선수들 개인의 기금으로 만든 암센터는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사람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끝이 없습니다.

어떠신지요? 축구를 좋아하지않더라도 좋아할만한 클럽 아닙니까?

셀틱에프씨! 축구 그 이상의 클럽. 저는 이 클럽을 사랑합니다.

셀틱에프씨의 노래인 over & over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We are Celtic supporters, faithful through and through,
and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우리는 셀틱서포터입니다.신념으로 가득차있죠.
넘고 넘어 우리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셀틱에프씨를 보면 스포츠도 사람의 이야기이고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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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의 프로야구선수들 중 외국인들도 많이 있지만 야구가 백인들의 전유물이던 시절, 그때는 미국선수라 할지라도 흑인들은 메이져리그 선수로 뛸 수 없었다. 그 시절 시대를 잘못 타고난 많은 흑인선수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Negro League라는 다른 리그에서 뛰어야만 했다.

1869년 , 최초로 메이져리그팀이 출현했을 때부터 1947년 제키 로빈슨이 최초의 메이져리그의 흑인선수로 등장하기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을 그들은 그렇게 '주변인'으로 보낸 것이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혐오는 결국 흑인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어도 계속 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흑인 중에 뛰어난 선수들이 더 많았으나 그들의 실력에 백인들이 밀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백인들은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적당한 실력'을 지닌 흑인선수를 찾았다.

한 마디로 백인보다는 적당히 떨어지는 선수를 원했던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늘 백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서 뽑힌 것이 '불멸의' 제키 로빈슨이었다. 하지만, 제키는 그런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백인선수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일약 명문 브룩클린 다저스의 핵심선수로 떠오른다.

메이저리그에서 6시즌동안 28승 31패 32세이브, 방어율 3.29

일견 아주 평범한(결코 비범하다고 할 수 없는)성적을 내고도 많은 야구전문가들에 의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선정된 사첼 페이지도 그렇게 시절을 잘못 타고난 대표적인 선수중 하나였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입단한 것은 1948년, 그의 나이가 42살 되던 해였다.

웬만한 이들이면 선수가 아닌 코치나 감독을 할만한 운동선수로써는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에 'Player'로 등록된 것이다. 그는 흑인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Negro League에서 23시즌동안 2000승을 거두었던 '괴물'이었고(이것은 한 시즌당 100승 가까운 승수를 챙겼다는 얘기다. 등판한 거의 모든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는 얘기)모든 기량을 발휘하며 뛸 수 있던 시기에 흑인이란 이유로 철저히 외면되고 있었던 대표적인 선수였다. 아니, 외면이 아닌 의식되고 있던 것이리라.

그가 이제서야 '한 물'가고 만만해졌다고 생각한 구단들은 흑인들이 메이저리그로 슬슬 진출할 무렵인 1948년이 되어서야 헐값이 적혀있는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 모든 흑인들의 꿈이 메이저리그였던 것은 당연지사, 그는 기꺼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첫 해,  그를 받아줬던 클리블랜드는 월드 시리즈에 오른다. 하지만, 월드시리즈 마운드에서 승리투수가 될 수 있던 페이지를 팀은 월드시리즈 주전 엔트리에서 빼버렸고, 겨우 '패전처리투수'로 한 번 기용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같은 팀이면서도 백인들은 그렇게도 흑인에게 월드시리즈 승리투수의 영예를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한 불평등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1953년까지 지켰고(50년 독립리그로 잠시 외도하였다가 51년, 다시 지금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복귀, 45살의 나이에 12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한다) 59세가 되던 1965년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의 유니폼을 잠시 입고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 깜짝 등판, 3이닝을 완봉하는 '환갑쇼'를 보여주기도 한다.

솔직히 난 이 흑인선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못했었다. 그런데..예전 Triple Play 2001이라는 전자오락 게임에 열중하다가 거의 칠 수 없는 마구를 던지는 상대편 투수를 게임 중에 만났고 그의 이름이 Satchel Paige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MLB사이트를 뒤져서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에 대해 알아냈다.

당연히 최초의 메이저리그 흑인 선수라는 영예를 '너무나도 출중한 실력'때문에 빼앗겼던 그는 1971년 니그로리그 출신 선수중 최초로 명예의전당(Hall Of Fame)에 헌액되었고 1982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라.
포기하고 슬퍼하지도 말라.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그리고 일이 순조로울 때 기도하지 않았다면
근심이 생겼을 때도 기도하지 말라.

Never let head hang down.
Never give up and grieve.
Find another way.
And don't pray when it rains
if you don't pray when the sun shines.

- Satchel Paige -


BGM :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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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한물 가버렸지만 헤비급 복싱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등 불세출의 복서들도 많이 탄생했던 가장 무거운
남자들의 스포츠 헤비급 복싱...마이크 타이슨을 정점으로 하여 한물 가버린 그 곳에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복서가 한명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로
꼽히는 챔피언이죠. 그의 이름은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

예전에 사각의 링의 왕좌를 차지한 이들은 그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도 많은
팬들의 귀감이 되곤 했습니다. 노예의 성을 버리고 조상의 이름을 찾고 부당한 전쟁에 맞써서
참전불가를 외쳤던 무하마드 알리도 있었고 목사로 변신,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다시 글러브를
끼었던 노인복서 포먼도 있었지요.

하지만, 불한당과 같은 타이슨의 등장 이후 모든게 변해버립니다.
누구보다도 강할지는 모르지만 그 주먹을 링 밖에서 휘두르는 만행도 서슴치 않는 '복서'아닌
'깡패'의 등장은 헤비급 복싱의 사양길을 부채질 합니다.

록키 마르시아노(Rocco Francis Marchegiano : 1923.9.1~1969.8.31) 
"The Brockton Blockbuster.  Rocky , Marciano"

미국의 프로복싱 선수. 매사추세츠주(州) 출생.
미국 출생의 이탈리아계(系) 백인으로 1947년 3월 17 일 프로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 J.왈콧으로부터 세계 타이틀을 빼앗고, 1956 년 무패의 기록으로 은퇴할 때까지
6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하였다.
저지 조 월 콧, 조 루이스와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할거하던 시대였으나 그들을 모두
무릎꿇리며 세계 헤비급의 역사를 장식했던 백인 챔피언이다.
1959년 복싱 전당(殿堂)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9년 8월 31일, 자신의 생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전적은 49전 전승 43KO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다운당한 적 없고(사실 한 번 있었지만 거의 슬립수준이었죠) 근소한 차이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완벽한 복서였습니다.
엄청난 펀치력에 타고난 스테미너, 집요한 연타능력으로 여섯번의 판정경기에서도 전원일치의
판정을 얻어냈죠. 그가 백인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지만 그도 흑인만큼이나
미국 사회에서 푸대접받던 이탈리아 이민의 자손이었습니다. 세계 복싱사상 상대가 없어서
은퇴를 결정한 이도 그가 최초였죠. 라이벌이라고 말할 사람조차 나오지 못했죠.
불세출의 강자. 그것이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와 무하마드 알리를 모델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록키'죠.
역시 이탈리아 이민의 자손인 스텔론은 이 영화에서 두들겨 맞으며 '아메리카 드림'을
선보입니다만 정작 진짜 록키는 두들겨맞기 보다는 패는 쪽에 능한 복서였습니다.
권투를 좋아하지 않지만 헤비급에 그와 같은 강자가 다시 나타난다면(타이슨 같은 양아치
말고요)다시 채널을 맞추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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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을 지나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의 나이까지 나를 지배하는 몇 가지가 있다면 빠지지 않는 것이 ‘야구’다. 어린 시절부터 실제로 즐기는 것과 야구장을 찾는 것, 그 모두를 즐겼던 탓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이젠 없으면 못사는 그런 경지(?)에 까지 이르렀지. 예전, 숙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처럼 “둥근 공을 좋아하는 사람은, 둥근 것은 모두 좋아한다.”고 했던 약간은 억지 섞인 얘기처럼 이젠 내 체형마저 둥근 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것이 야구를 좋아하는 탓은 아닐테지만.



재작년, 보스턴은 지긋지긋한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맞수 양키즈와의 7전 4선승제 경기에서 3패로 밀리다 4연승을 올리는 기가 막힌 리그 챔피언쉽의 여세를 몰아 90년 가까이 지긋지긋하게 달라 붙어있던 저주를 후련하게 날려버린 것이지. 그때, 레드삭스 선수들이 했던 말들은 모두 ‘저주를 깨고 우승해서 기쁘다.’는 말들이 그 골자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의 말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 ‘팬들에게 이 영광을!’이라는 아주 상투적이면서도 ‘당연한’ 맨트였다. 사실, 90년을 한결 같이 도저히 깰 수 없어보였던 저주와 함께 싸워준 ‘RED SOX FAN'들이야 말로 그런 찬사를 듣는 것이 당연했다.


영화 ‘날 미치게하는 남자’는 바로 그들에 관한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야구밖에 몰랐던 한 청년이 야구냐 사랑이냐를 고민하다가 결국 둘 다 쟁취하게 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사뭇 드라마틱 하다. - 물론 이 작품의 원작인 영국출신 작가 닉 혼비의 ‘Fever Pitch'에서 그려지는 것은 사실 야구가 아닌 축구고, 레드삭스가 아닌 아스날이다. 뿐만 아니라 아스날은 레드삭스처럼 90년간의 저주에 시달린 팀은 더더욱 아니다. 1886년 창단 후, 지금까지 11회에 걸쳐 자국의 1부 리그를 주름 잡았으며(이는 리버풀FC,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우승기록이다) 최근에도 여전히 우승후보로 빠짐없이 거론되는 강팀이다. -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더없이 다정다감하고 멋진 남자가 시즌만 시작되면 도대체 철없는 ’훌리건‘으로 둔갑한다. 야구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으며(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가장 즐기는 일 세 가지를 RED SOX의 경기, SEX, 숨쉬기를 꼽는다. -.-;;) 여자친구가 파울볼에 맞아 쓰러지는데도 공을 잡은 사람과 악수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남자...하지만, 영화 서두에서 감독 페럴리 형제들이 깔아둔 말은 그럼에도 신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창조물 중 하나로 그를 꼽아둔 것이다.
바로 ’RED SOX FAN'이라고.


어쨌든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여자친구냐 RED SOX냐를 고민하다가 결국 사랑을 택하고, 그가 못마땅하던 여자친구는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기꺼이 RED SOX FAN으로의 변신을 선택한다. 결국 그들은 2004년, AMAZING SOX의 활약을 펜웨이 파크에서 맞이하게되고 영화는 끝난다.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는 말했다. 시즌만 되면 보스턴이란 도시 전체가 ‘미치는 것’ 같다고. 특히 시즌 중에도 양키즈를 꺾은 날에는 도시가 들썩거리고, 반대로 패한 날은 우울한 분위기가 도시를 감싼다고. 결국 스스로도 ‘RED SOX FAN'이 되어버린 친구 역시 재작년의 경험은 너무나 즐거웠다고 귀띔했다. 보스턴이 아닌 서울에서, 펜웨이 파크가 아닌 TV로 지켜봤어도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작년, 곰들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 RED SOX팬들이 YANKEES를 싫어하는 유사한 이유로 - 사자들에게 스윕당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곰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작년 플레이오프에서 주저앉은 보스턴의 그 악동(?)들도 다시 올해를 기약할 것이다. 곰들이나 RED SOX나 오해, 다시 도약하길 바라며 두서없는 글을 접는다. ^^


(현재 보스턴은 지긋지긋한 양키즈에 이어 2위, 곰들은 5위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팬이니까...)


BGM : Dawm Yankees - High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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